한국은행은 은행 중의 은행이다. 한국에서 발행되는 모든 돈은 한국은행에서 출발해 다시 원점으로 돌아온다. 유가증권 중 발행처로 다시 돌아와 순환되는 것은 돈밖에 없다. 돈이란 정말 기묘한 것이다. 바닷가 모래 위에 있는 조개껍질은 죽은 조개의 시체.. 그냥 쓰레기에 불과하다. 그러나 힘센 존재, 예를 들면 아주 강력한 국왕이 나서서 함부로 조개를 주워가면 목을 친다고 하는 순간, 아무것도 아닌 조개껍질이 돈의 역할을 하게 된다. 소금도 마찬가지이다. 아무나 소금을 채취하지 못하게 하면, 소금 역시 돈이 된다. 국가와 화폐는 불가분의 관계를 갖는다. 그리고 이때의 국가가 바로, 한국은행이다. 돈이 순환하듯이, 경제에 대한 정보 역시 돈을 따라 중앙은행으로 돌아와야 한다. 만약 그럴 수 없다면, 당연히 중앙은행은 그렇게 될 수 있도록 해야 한다.
한국은행이 내보낸 돈은 건설사를 축으로 하는 재벌들에게 흘러간다. 그 돈의 극히 일부가 국민들의 일상생활로 들어간다. 그러나 그보다 더 심각한 것은 정보이다. 정부기관들 사이로 정보가 돌지 않고, 롱골드 같은 로펌이나 컨설팅 회사로 흘러 들어간다. 몇 년 전부터 그런 일들이 점점 잦아지더니, 지난 정권부터는 정부에서 만드는 금융과 관련된 기초 문건조차 그런 로펌에서 직접 만들기 시작했다. 이제 금융 쪽 공무원들은 스스로 문서를 만들지 못한다. 가을에 국정감사가 벌어지면 공무원과 경제연구소 등 산하기관에서 밤을 샜는데, 이제는 로펌의 변호사들이 대신 밤을 샌다.
'한국의 돈은 어디에서 와서 어디로 가는가?'
한국의 수많은 경제학자가 학부에서 처음 경제학 수업을 들을 때 갖게 되는 질문이다. 그렇지만 대부분의 경제학도는 대학원에 진학하거나 현장으로 들어가면서 이 질문을 잊는다. 돈이 어디에서 와서 어디로 가는지 대신 누가 자기에게 월급을 주는지, 그리고 아무런 통제가 없어 눈먼 돈과 마찬가지로 취급되는 쿠폰 프로젝트' 나 평가 수당' 같은 사이드 머니에 더 많은 관심을 가지게 된다. 이런 게 망해가는 국가의 특징이다. 한 사회의 엘리트들이 자신들의 삶과 권력을 지탱해주는 대다수 구성원에 대한 고민을 잃어버릴 때, 그 사회는 내부로부터 붕괴하게 된다. 그리고 경제학자들이 그 나라의 경제 현상에 대한 관심을 버리고, 오로지 자신의 경제적 삶의 가치만 추구하려 할 때, 부패는 필연적이다.
물은 높은 곳에서 낮은 곳으로 흐른다. 그러나 권력은 낮은 곳에서 높은 곳으로 향한다. 그렇다면 돈은? 더러운 곳에서 더 더러운 곳으로 향한다. 그리고 없는 사람들의 작은 돈이 모여 강한 사람들의 큰돈이 된다. 가장 더러운 사람은 감옥에 가는 것이 맞겠지만, 그런 일은 벌어지지 않는다. 2008년, 글로벌 금융위기가 벌어진 후, 누구 한 명 잘못했다고 나섰던 사람이 있고, 누구 한 명 감옥에 간 사람이 있는가? 1997년, 한국에서 외환위기가 터진 후, 감옥에 간 사람은 물론이고, 사과한 사람이 한 명이라도 있었던가? 돈이 관여된 전쟁에서는 자기 돈이 어디로 가게 되는지 그리고 최종적으로 어디로 가는지는 물론이고, 자신들이 왜 죽는지도 모르고 죽게 된다. 글로벌 금융위기나 IMF 사태 때, 실업으로 자신의 경제적 삶이 붕괴된 사람들이 도대체 무슨 이유로 자기가 그렇게 거리로 내몰리게 되었는지 알 수 있었을까? 착하디 착한 대한민국 국민들은 실제로 그 상황을 만든 사람들이나 자신들을 그렇게 방치한 사람 대신, 자신을 원망하면서 오늘도 힘겨운 삶을 버텨낸다.
이현도가 다시 오지환에게 소주잔을 넘겼다. 그런 후, 빈대떡 한 조각을 집어 먹으며 회상에 잠긴 듯한 표정을 지었다.
“70년대에는 이 빈대떡이 얼마나 맛있었는지 아나? 우리는 거기서부터 출발했어. 그걸 잊으면 안 돼.”
오지환도 빈대떡을 집어 먹으며 말을 받았다.
"그렇다고 빈대떡 먹던 그 군인들의 시대로 다시 돌아갈 수는 없죠.. 엘리트들의 시대는 끝났어요. 이젠 시민의 정부라구요. 경제도 마찬가지예요. 사람들의 뜻이 모여 움직이는 거지, 누가 끌고 갈 수 있는 시대가 아닙니다."
“저는 청와대 경제수석 오지환이라고 합니다. 여기는 한국은행 환율실입니다. 저희는 지난밤부터 원화에 대한 공격을 막아내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새벽에 우정사업본부의 연기금을 비롯한 국민들의 돈까지 동원한 모피아들에 의해 2차 방어선이 붕괴되었습니다. 원화가 무너지면 청와대가 무너지고, 국민 경제가 무너지고, 우리 모두가 무너집니다. 우리는 무조건 여기서 원화를 지킬 겁니다. 우리가 준비한 자금은 이제 남은 게 없습니다. 이 나라의 경제수석으로서, 시민 여러분에게 호소합니다. 10원도 좋고 100원도 좋습니다. 지난밤, 우리는 50조 원의 외부 공격을 막아냈습니다. 이제 한 번만 더 막으면 원화를 지킬 수 있습니다. 저, 경제수석에게 딱 하루만 돈을 빌려주십시오. 제가 반드시 원화를 막아내고, 꼭 다시 돌려드리겠습니다.
대통령께서는 지금 사직을 고민하고 계십니다. 한국의 돈, 한국 경제, 한국의 대통령을 모두 지킵시다. 공적자금과 연기금이 자국의 화폐를 공격하는 이 이상한 나라, 이 역사를 바꿉시다. 우리의 마음이 투기자금을 이겨내는 걸 보여줍시다. 전 세계 여러분에게 호소합니다. 저는 대한민국 대통령의 경제수석, 오지환입니다. 시민과 연대의 정신이 투기의 시대를 극복하고, 신냉전으로 가는 걸 이겨내야 합니다. 무기와 투기로 가는 돈들 대신, 우리의 삶을 위해 정말로 소중한 돈이 사용되는 시대, 동북아의 평화국가, 한국 경제가 방향을 바꾸면 세계 경제가 바뀝니다. 세계 여러분에게 연대의 정신으로 호소합니다. 돈과 마음의 전쟁에서 마음이 이길 수 있도록 도와주십시오. 평화 경제로 갚겠습니다. 전쟁 없는 세상, 우리가 같이 만들어갑시다. 저에게 24시간 동안만 돈을 빌려주십시오."
요구르트를 손에 든 할머니가 대통령 앞에 섰다. 그녀는 요구르트와 함께 꼬깃꼬깃한 만 원짜리 지폐 몇 장을 대통령에게 건넸다. "이거 받으씨오, 대통령님, 돈이 없어서 대통령 관둔다고 딸이 그럽디다. 그러면 몹써요. 내 돈이라도 받으씨오."
대통령은 걸음을 멈추고 할머니가 건넨 돈을 받았다. 할머니는 그걸로 성에 안 찼는지 손가락에 끼고 있던 금반지를 빼서 건넸다. "이것도 마저 받으씨고, 힘내랑께요."
대통령은 당선이 확정되던 순간 느꼈던 감격 이상의 기분을 다시는 겪지 못할 줄 알았다. 대통령은 지금 이 순간, 그것과는 전혀 다른 종류의 강한 감동을 느꼈다. 주체할 수 없는 감동을 느끼면서, 대통령은 자신도 모르게 마포대로 한복판에서 할머니를 향해 큰절을 했다. 꼬깃꼬깃한 만 원짜리 몇 장과 금반지 한 개, 지금 오지환이 싸우고 있는 돈과는 비교도 되지 않는 것이다. 그러나 오지환이 가끔 말하던, 마음을 이기는 돈은 없다는 말이 무슨 의미인지 지금에야 이해가 됐다. 대통령이 할머니를 향해 큰절을 하자, 주위에 서 있는 사람들이 박수를 치기 시작했다. 할머니는 큰 절을 하고 일어나는 대통령의 등을 두드렸다.
"잘해요, 잘해. 내, 당신 찍었당께. 진작에 요로코롬 했어야제." "네, 고맙습니다. 앞으로 잘하겠습니다."
"어이, 대통령. 난 당신 안 찍었어. 그래도 원화는 꼭 지켜내시오. 내 환갑반지, 이거라도 받아요."
뒤에 서 있던 한 노인이 반지를 건네며 말했다.
사람들은, 아니 국민들은 지니고 있던 목걸이나 귀걸이, 반지 같은 것을 빼서 대통령에게 건넸다. 대통령은 고개를 숙이며 사람들이 건네는 물건을 받아 양복 주머니에 집어넣었다. 하지만 반지나 목걸이를 건네는 사람들은 좀처럼 줄어들지 않았다. 비서실상이 황급히 자신의 재킷을 벗었다. 그의 재킷은 요긴한 보자기가 되었다.
"지지 마세요. 대통령, 파이팅!"
대통령과 국민들은 마포대교를 걸어서 건넜다. 1년 전, 그날도 대통령은 오지환과 둘이서 대통령 전용차를 타고 마포대교를 넘었다. 그날은 대통령의 경제 결정권을 총리에게 넘기는 날이었다. 그러나 오늘은 수십만 명의 시민과 함께 그 길을 걸고 있었다. 그들이 오지환에게 빌려준 돈, 아니 대통령에게 빌려준 돈, 그 마음을 모아서 투기자본과 국민의 세금으로 사람들의 삶을 갈취하고 있던 자들의 쿠데타 시도를 막아내고 당당히 국회로 입성하는 중이었다. 대통령은 지금 그 어느 때보다 당당했다. 지도자의 승리는 개인의 승리가 아니다. 자신을 지도자로 만들어준 국민들이 승리하는 순간, 그때가 비로소 지도자가 승리하는 순간이다.
국회 정문 앞, 대통령은 영등포 경찰서에서 준비한 간이 연단에 올랐다. 연단 주변에 모인 사람들이 열렬히 환호했다. 1년 전, 총리에게 권한을 넘기러 왔던 이곳, 그리고 오늘 아침까지만 해도 사직서를 내러 와야 할지 몰랐던 이곳, 바로 이곳에서 그가 지금과 같은 감격적 연설을 하게 될지는 몰랐다.
“여러분, 오늘 저는 여러분의 마음과 정성에 힘입어 원화를 공격하고 정권을 침탈하려던 쿠데타 세력을 막아냈습니다. 다시는 이런 일이 없을 것임을 지금 이 자리에서 국민 여러분에게 약속합니다. 여러분이 저에게 보내주신 소중한 한 푼 한 푼, 그 힘으로 우리가 이겼습니다. 다시는 모피아 같은 세력들에게, 여러분의 권리와 삶이 빼앗기는 일이 없게 하겠다고, 제가 약속드리겠습니다."
대통령은 감격에 겨워 잠시 말을 멈추고 주위를 둘러보았다.
"긴 밤을 같이 해주신 한국은행 여러분께 국민들을 대신해 다시 한번 감사드립니다. 앞으로도 각고의 노고를 부탁드립니다. 지난밤의 싸움으로, 우리에게 소중한 돈 30조 원이 남았습니다. 빌린 돈들 다 돌려주고 나서도 30조 원 정도가 남을 거라는군요. 저는 이 돈으로, 지난밤 싸움에서 한축을 담당한 외환은행을 원화은행'으로, 우리의 돈을 지키는 공공의 은행으로 전환할까 합니다. 그리고 이번에 희생양이 된 산업은행은 이제 시대의 흐름에 맞춰, '시민은행'으로 전환할까 합니다. 앞으로는 시민을 위한 경제, 시민경제를 받치는 은행이 되도록 하겠습니다."
연단 주변을 둘러싼 국민들의 함성 소리가 여기저기에서 터져 나왔다.
"그리고도 돈이 많이 남아요. 다 여러분의 정성입니다. 이 돈은 앞으로 시민경제 기금으로 기부할까 합니다. 시민 여러분 한 분한 분의 삶이 어렵거나 외로운 순간, 저를 찾으십시오. 아니 시민경제 기금을 찾으십시오. 국가가, 공무원이, 관료들이 시민을 버리더라도, 여러분이 만들어주신 이 돈은 절대 여러분을 버리지 않을 겁니다. 고맙습니다. 지금부터 저는 국회로 가서 잃었던 경제권을 다시 찾을 겁니다. 다시는 이런 불행한 일이 없도록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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