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 네 이야기를 들으며 창밖으로 쏟아지는 빗줄기를 바라보는 지훈처럼 나도 너의 말을 곧이곧대로 믿는다. 파도가 바다의 일이라면, 너를 생각하는 건 나의 일이었다. 너와 헤어진 뒤로 나는 단 하루도 너를 잊은 적이 없었다.
2005년을 기점으로 너는 나보다 더 나이가 많아졌지. 그럼에도 네가 영원히 내 딸이라는 게 믿기지 않는다. 내 안에서 나보다 나이가 많은 네가 나왔다니, 그게 얼마나 대단한 경험인지 네게 말하고 싶지만 말할 수 있는 입술이 내게는 없네. 네 눈을 빤히 쳐다보고 싶지만, 너를 바라볼 눈동자가 내게는 없네. 너를 안고 싶으나, 두 팔이 없네. 두 팔이 없으니 포옹도 없고, 입술이 없으니 키스도 없고, 눈동자가 없으니 빛도 없네. 포옹도, 키스도, 빛도 없으니, 슬퍼라, 여긴 사랑이 없는 곳이네.
"그건 네가 몰라서 하는 소리야. 디지털 기기가 발달하면서 다들 소통이나 연결이니, 이런 말들이 최고의 가치를 지닌 것 같지만 오히려 피로를 호소하는 사람들도 꽤 많다고."
“책 같은 게 있을 것이라고 생각할 수도 있겠지만, 그게아니야. 원래 그 자리는 고독의 자리였어. 혼자 존재하는 자리. 불과 20여 년 전만 해도 고독은 흔했지만, 지금은 디지털 기기에 밀려 일상에서 고독이 사라지면서 고독의 의미가 완전히 달라졌어. 21세기에 우리에게 허용된 고독의 공간이란 산티아고 순례길이나 안나푸르나 베이스캠프 트래킹 루트, 혹은 코타키나발루 고급 리조트의 모래사장 같은 곳이지. 관광 산업이 정교하게 관리하는 이 고독을 경험하려면 몇 달 월급을 쏟아부어도 모자랄 판이야. 시간이 지날수록 고독의 가치는 점점 더 커질 거야."
"조금만 생각해보면 알겠지만, 요즘 세상에는 값싸게 즐길 수 있는 고독이란 게 없어. 돈을 지불하지 않은 고독은 사회 부적응의 표시일 뿐이지. 심지어는 범죄의 징후이기도 하고, 예를 들어 선생들은 무리에서 떨어져 혼자서 지내는 학생에게서 자살이나 학교 폭력의 가능성을 읽고, 이웃들은 친구나 가족의 왕래가 없이 살아가는 1인 가구의 세대주가 잠재적으로 범죄를 저지르는 사이코패스가 아닌지 늘 경계를 늦추지 말아야만 하잖아. 우리 시대의 고독이란 부유한 자들만이 누릴 수 있는 럭셔리한 여유가 된 거야.
'책 한줄' 카테고리의 다른 글
[내돈내산 BOOK리뷰] #036 오후도 서점 이야기 (0) | 2022.01.21 |
---|---|
[내돈내산 BOOK리뷰] #035 날씨가 좋으면 찾아가겠어요 (0) | 2022.01.14 |
[내돈내산 BOOK리뷰] #033 사랑의 온도 (0) | 2021.12.29 |
[내돈내산 BOOK리뷰] #032 그리고 산이 울렸다 (0) | 2021.12.22 |
[내돈내산 BOOK리뷰] #031 듄1(DUNE) (0) | 2021.12.22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