확신의 신념이 초래하는 불확실성에 관한 확신. 확신이 곧 확실은 아니다. 당신은 스스로 생각하는 것보다 현명하지 않다. 당신은 스스로 생각하는 것보다 유능하지 않다. 그 제로베이스를 포용할 수 없는 이들에게는 아무런 가능성도 열리지 않는다. 그저 자기 신념 안에 갇힐 뿐이다. 다른 누군가의 이야기를 하는 게 아니다. 자기 신념에 대한 확신으로만 그득한 당신과 나의 이야기다.
성인이 된 이후로 나는 가끔씩 머리를 길러 묶곤 했었다. 교직 시절에는 누가 규제하는 것은 아니더라도 당연히 이 머리를 할 수가 없었다. 그런데 어느 해에 머리를 묶고서 출근하는 음악 교생이 나타났다. 저게 도대체 정신머리가 있는 놈인가 싶은 속 좁은 성토. 그런데 나도 그런 시절이 있었고, 예전에는 스스로 긍정했던 가치였건만, 그 비슷한 가치로 살아가는 타인의 모습을 부정하는 오늘의 모순. 꼰대 기획을 하면서 내 스스로 돌아보게 되는 꼰대력도 적지 않다. 그래서 앞으론 조심하려 애쓰는 것들. 저들이 점하고 있는 젊음의 자리를 질투하지 말 것. 어린 친구들을 내 기준에서 평가하지 말 것. 물어 오기 전에는 내가 먼저 다가가서 대답을 늘어놓지 말 것. 이해가 가지 않거들랑 그냥 존중하고 인정할 것. 그렇다고 나에게 어울리지도 않는, 그 본질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는 시대의 담론을 섣불리 욕망하지 말 것.
청춘의 시절이 아픔이어야 하는 상관의 정당성에 제기되는 문제점도 있겠지만, 보다 근본적인 것은 그 아픔의 질량 문제이다. 이런 식으로 아프고 싶지 않고, 아파도 내가 하고 싶은 것을 하며 아프고 싶지만, 지금을 살아가는 청춘들에겐 아픔의 매뉴얼도 한결같다. 족구를 하다가 발목을 접질렸다면야 얼마든지 감내할 수 있는 아픔이지만, 청춘들은 백방으로 이력서를 내러 다니다가 발이 퉁퉁 붓고, 며칠 뒤에는 눈이 퉁퉁 붓는다.
지금에 와서 내 경우를 돌아보자면, 왜 내가 그때 글을 쓰겠노라 결심을 했던 것인지가 당최 이해가 되지 않는다. 하긴 너무 합리적인 사고로는 아무것도 저지르지 못한다. 물론 너무 충동적인 기질로도 아무것도 이루지 못하지만···. 그런데 이미 저지른 걸 또 뭐 어쩌겠나? 이 순간의 선택을 후회하지 않도록, 한 줌의 용기를 잇대고 덧대야 지. 혹여 잘못되는 건 아닐까를 걱정할 필요는 없다. 이미 그 자체로 잘된 상태는 아니다. 그래서 이왕 그렇게 저질러 버린 김에, 두 주먹 불끈 쥐고서 끝까지 가는 거다.
비틀즈와 동격의 표상이다시피 한 음악은, 실상 비틀즈 멤버들에게서 우리답지 않다는 이유로 환영받지 못했었다. 비교적 간단한 악기 구성의 클래식한 편곡은, 폴 매카트니 혼자 녹음을 한 것이다. 그러나 처음에는 폴 매카트니도 이 노래의 클래식한 편곡을 마음에 들어하지 않았다고 한다. 비틀즈가 해왔던 음악과는 다소 거리가 있었던 이유에서였다. 하지만 원곡자를 부단히 설득한 프로듀서의 직관이 불후의 명곡을 탄생시킨 것이다. 이 일화를 자기계발서의 논리로 각색한다면, 폴 매카트니의 소신과 양보 사이에서 무엇을 택해야 하는 것일까? 저마다 우겨 대는 직관의 명분도 그것이 적소의 역량을 증명했을 때나, 훗날 돌아보면 남달랐던 안목으로 회고될 수 있는 경우이다. 문제는 그 적소성의 지점이 어디인지를 쉽게 예측할 수 없다는 점. 이미 벌어진 결과로부터 상관을 추출해 내는 것은 비교적 쉬운 작업이다. 그러나 상관이 곧 인과인 것은 아니며, 앞으로 벌어질 불확실성에 대해서는 누구도 장담할 수 없는 법이다.
소신과 양보 사이에서의 선택은 쉽지 않은 문제이다. 자신의 신념을 지킨 것뿐인데, 그 너머에 있는 행운을 걷어찬 결과가 되어 버리기도, 남의 조언에 혹은 다수의 견해에 귀를 기울였다가 낭패를 보기도 하는 인생. 그렇듯 삶은 자아와 타자 사이에서의 줄타기이다.
우리나라에서도 화제가 되었던 영화 <세 얼간이>에서 주연을 맡았던 아미르 칸은, 자국민들에게도 크나큰 사랑을 받는 국민배우라고 한다. 인도 사회에 만연해 있는 혹은 은폐되어 있는 부조리를 고발하고, 사회적 약자들을 위한 다양한 활동을 펼치고 있는, 행동하는 지성이자 그야말로 영화처럼 사는 영화인. 그가 감독과 주연을 겸했던 <지상의 별처럼>의 주제는 <세 얼간이>와 맞닿아 있다. 우리가 말하는 '꿈'이란 것이 과연 자신이 정말로 원하고 바라는 열망의 방향성일까, 아니면 어른들로부터 강요되어졌던 가치들로 학습된 욕망일까에 관한 문제.
우리는 그 3분을 위해 일주일을 연습했는데···. 어른들이 그렇다. 그런 거 해봐야 재미없다고, 그런 거 해봐야 의미 없다며, 자신들의 재미와 의미를 권고하는 것으로 아이들의 재미와 의미를 미리 지정한다. 서투른 과정 안에서 숙련할 것들을 판단하고 선택하는 것이기도 한데, 아이들에겐 그런 권리도 잘 주어지지 않는다. 꿈이란 것도 완성된 채 다가오는 것은 아니다. 그저 막연한 설렘으로 끌려가고 있다는 사실 하나가 확연한, 그 미완으로부터 점점 채워 가는 것이지. 하긴 꿈 자체가 완성되는 성격이 아닌지도 모른다. 꿈의 완성이란 곧 깨어나는 것을 의미하지 않겠나? 꿈이란 항상 '꾸는 채'로 남아 있는 진행형이다. 꿈을 되찾는다는 말은, 버릇처럼 들뢰즈의 철학을 빌려 설명하자면, 다시 '되기'의 상태로 돌아간다는 의미이다. 이미 무언가가 되어 버린 상태가 아닌, 언제나 되어 가고 있는 상태로.
분명 내가 써버린 시간들이긴 한데, 어쩌다 이렇게 나이만 먹었는지···. 빛바랜 추억속의 나를 들춰 보며, 내게 언제 저런 시절이 있었나 싶은 착잡하고도 허무한 마음. 우리는 어쩌면 나이를 거꾸로 세고 있는지 모른다. 탄생에서부터가 아닌 죽음에서부터 말이다. 언제인지 모를 막연한 끝으로 다가가고 있다는 불안감. 돌아보니 지금까지 뭐하나 이루어 놓은 것이 없다는 상실감. 그렇다고 뭘 해야 할지도 모르겠는, 뭘 하기에는 또 애매한 청춘이라는 불안감 자체를 불안해하고 살아간다. 다시 돌아가고 싶은 빛바랜 시절 속에서도 우리는 그 시절 나름의 불안을 살아가고 있는 중이었다. 하지만 어른이 되어서는 그 시절의 근심과 걱정들을 '어렸다'라는 표현으로 뭉뚱그리곤 한다. 그 시절의 근심과 걱정 따윈 근심도 걱정 도 아니라는 듯. 또 시간이 흘러 지금을 돌아보게 될 미래에서는, 오늘 느끼고 있는 이 불안을 '어렸다'라고 말하고 있을지 모를 일인데 말이다.
사랑하는 사람과의 우연한 마주침을 가장했던, 그 한 번 한 번의 소중한 타이밍들을 향해 숨 가쁜 설렘으로 내달리던 그 시절처럼, 소녀는 행복하고 싶었을 뿐이다. 그 행복을 위해서 열심히 살아온 것뿐인데, 삶의 어느 순간에 낭만의 손을 놓쳐 버리고 말았다. 이젠 늘 어디가 아프신 엄마, 병원에서 받아 오는 한 달치 약봉투에 가슴이 먹먹해지는 나이가 되어서야, 설득보다 먼저 이해가 앞서야 하는 일이란 사실을 깨달았으면서도, 여전히 가끔씩은 엄마를 이해하지 못할 때가 있다. 세상에서 가장 사랑하는 사람이면서도, 가장 많이 싸워야 했던 존재. 슬픈 너의 이름, 엄마.
한 줄 PICK,
서투른 과정 안에서 숙련할 것들을 판단하고 선택하는 것이기도 한데, 아이들에겐 그런 권리도 잘 주어지지 않는다. 꿈이란 것도 완성된 채 다가오는 것은 아니다. 그저 막연한 설렘으로 끌려가고 있다는 사실 하나가 확연한, 그 미완으로부터 점점 채워 가는 것이지.
어린 시절에는 그렇게 싫어했던 어른들의 가치를, 삶의 어느 순간부터 ‘그런 게 삶이라는’ 긍정의 체념으로 살아가면서 기성의 담론에 저항했던 시절이 있었다는 사실을 기억하지 못하는, 바로 당신과 나에 관한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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