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내가 은상 언니의 휴대폰을 뚫어져라 보고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솔직히 보고 싶었다. 대체 그 휴대폰 안에 있는 게 뭐기에 천하의 강은상에게 그토록 밝은 미소를 짓게 했는지 궁금했다. 하지만 지송이가 너무 부정적으로 반응하는 바 람에 더 묻지는 못했다. 은상 언니가 지송이에게 눈을 흘겼다. "싫으면 말아라? 알려달라고 해서 알려줬더니." 나는 아니었다. 나는 알고 싶었다. 하지만 동시에 알고 싶지 않기도 했다. 이유는 확실히 모르겠다. 만약 언니가 해외토픽 기사에 나온 미국의 십대나 운 좋은 개발자처럼 백만장자가 된다면, 평가 등급의 I와 M, 연봉 인상률의 2%와 3%의 차이 같은 것에 대해 더는 연연하지 않을 수 있게 되었다는 걸 내가 알게 된다면, 그 뒤에 내게 찾아올 욕망이 조금은 두려웠기 때문이라고 해야겠다.
화면에 엄지와 검지를 브이 자 모양으로 벌린 채 가져다 댔다. 뒤이어 화면 위에서 두 손가락을 재빨리 모아 붙였다. 두 손가락 사이의 거리가 좁아짐과 동시에 그래프도 빠른 속도로 축소되기 시작했다. 화면 배율이 줄어들었고, 막대기들도 일제히 축소되고 모이면서 순식간에 시야가 삽시간에 넓어졌다. 그러자 마침내, 화면 속에 거대하고 가파른 곡선 하나가 나타났다. 왼쪽에서 오른쪽으로 조금씩 오르락내리락하기를 반복하며 약간 아래로 기우는 듯하다, 아무도 예측하지 못한 때에 별안간 치솟으며, 깎아지를 듯, 뭐라도 뚫을 기세로, 급하게 우상향하고 있는, J커브였다.
몸속에서 무언가가 발밑을 향해 덜컥 내려앉는 느낌이 들었다. 그로 인한 파동이 온몸의 세포를 떨리게 만드는 듯한 감각마저 일었다. 그 순간 누군가 나를 어느 불꽃축제의 현장에 데려다 놓은 것만 같았다. 폭죽이 칠흑 같은 밤하늘 한가운데로 환한 빛을 밝히며 솟아오르는 기분. 고개를 잔뜩 쳐들어야 볼 수 있는 높은 곳에서 화약이 팡, 하고 터지며 황금 색 불꽃을 홀뿌리는 것 같은 기분. 그 파편들이 다시 반짝이며 아래로 내려앉는 소리, 왜인지 짤랑거리는 소리가 들리는 것 같은 기분. 단지 보는 것만으로도 돈벼락을 맞은 기분. 그런 기분들에 나는 꼼짝없이 휩싸였다.
그제야 비로소 알아차렸다. 내가 깊이 바라왔던 게 있다는 것을. J. 이거였다. 내게 절실히 필요한 것. 그래서 내가 기다려왔던 것은 다른게 아니라 바로 이런 모양, 이런 곡선이었다는 진실을 그 순간 섬광처럼 깨달았다. 나는 매일매일 모래알처럼 작고 약한 걸 그러모아 알알이 쌓아올리고 있었지만 그걸 쌓고 쌓아서 어딘가에 도달하리라는 기대도 희망도 가져본 적이 없었다. 그냥 그 행위를 멈추지 않고 계속하고 있다는 사실을 위안 삼으며 그런 동작을 반복하고 있을 뿐이었다. 여태껏 쌓은 건 지나가는 누군가의 콧김 같은 것에도 쉽게 부스러져내릴 수 있다는 사실은 구태여 직시하지 않을 뿐 이미 잘 알고 있었다.
그냥, 인생 자체가 그랬다. 지금까지 시간이 지날수록, 해가 지날수록, 태어나면서 한살 더 먹을 수록 늘 전보다는 조금 나았고 또 동시에 조금 별로였다. 마치 서투른 박음질 같았다. 전진과 뒷걸음질을 반복했지만 그나마 앞으로 나아갈 땐 한땀, 뒤로 돌아갈 땐 반땀이어서 그래도 제자리걸음만은 아닌 그런 느낌으로. 그렇게 아주 조금씩······ 천천히······ 서서히······ 차츰차츰······ 매일매일······ 하루하루······ 그뿐이었다. 대체 무엇을 감히 더 바랄 수 있을까?
이런 식의 박음질이 더는 지겨웠다. 나는 그냥 부스터 같은 걸 달아서 한번에 치솟고 싶었다. 점프하고 싶었다. 뛰어오르고 싶었다. 그야말로 고공 행진이라는 걸 해보고 싶었다. 내 인생에서 한번도 없던 일이었고, 상상 속에서도 존재하지 않았고, 그렇기 때문에 당연히 기대조차 염원조차 해본 적 없는 일이었다. 그런데 바로 지금, 그것이 내 눈앞에 번쩍이며 펼쳐져 있었다. J. 마주하는 순간 내가 그것을 원해왔다는 걸 한눈에 알아볼수 있었다.
대출금 전액이 상환되었습니다. "이것 봐, 나 이제 빛 없는 사람이야." 언니가 이어서 물었다. "너도 학자금 대출 있다고 하지 않았어?" 있지. 있고말고. 보아하니 언니는 등록금만 대출받은 모양이었지만 나는 4년 내내 등록금은 물론 생활비 대출까지 받아서 언니보다 상환할 금액이 훨씬 많았다. "너도 빨리 들어와. 솔직히 우리한텐 이제······ 이것밖에 없어. 아무런 대답 없이 생각에 잠겨 있는 내게 언니가 뜬금 없이 물었다. 예전에 우리가 아주 어릴 때 방영하던 타임리프 소재의 한 텔레비전 만화영화를 아느냐고. "왜, 이상한 선글라스 낀 주전자 나오는 거 있잖아." 물론 기억하고 있었다.
과거에서 온 천재 박사가 만든 돈데크만이라는 이름의 주전자가 이상한 리듬의 주문을 외우면 허공에 동그라미 형태의 터널 같은 포털이 뚫리고 주인공들이 그 터널로 쏙 빠져들어가면서 시간과 공간을 넘나들게 된다는 설정이었다. 언니는 다른 차원의 세계로 통하는 그 터널 형태의 포털이 어디서 어떻게 열렸는지를 잘 떠올려보라고 했다.
"아주 어이없는 곳에, 난데없이 열리잖아. 상상도 안 해본 곳에서." 그러더니 아이패드 화면에 띄워둔 이더리움 그래프를 다시 가리키며 이게 바로 그런 것이라고 말했다. 생각지도 못한 엉뚱한 곳에 갑자기 열린 만큼, 포털은 계속 그곳에 뚫려 있지 않을 거라고 했다. 기이하고 불가해한 띠용 띠용 소리를 내면서, 꿀렁이는 파란빛을, 어쩐지 기분 나쁜 파장을 반복적으로 내뿜으면서, 이쪽 세계에서 저쪽 세계로 터널을 열어주며 뚫려 있다가 몇명이 들어가고 나면 그 동그란 형태의 입구가 서서히 좁아지고, 금세 봉합하듯 샤샤샥 닫혀버리는 거라고. 그건 찰나의 행운과도 같아서 열려 있을 때 바로 들어가지 않으면 놓쳐버리는 거라고.
"난 이게 우리 같은 애들한테 아주 잠깐 우연히 열린, 유일한 기회라고 생각해." '우리 같은 애들'이라는 세 어절이 머릿속에 메아리처럼 계속, 또 계속 맴돌았다.
이 사람들을 마음 놓고 편히 좋아할 수 있었다. 이들과 있으면 내 삶이 딱히 별로라는 생각도 잘 들지 않았다. 서로가 자신의 자리에서 이 정도면 성실하게 잘 지내고 있다는 생각만 들었다. 여태까지는 그랬다. 그런데 바로 지금, 난데없이 허공에 뚫린, 기이한 빛을 내뿜으며 일렁이는 터널 앞에서 은상 언니만 자기 발목에 매달린 쇠사슬 같은 걸 눈앞에서 툭 끊어내고 그 속으로 쏙 들어가버린 것이다. 그 입구에 서서 손을 흔들고 있는 것이다. 언니는 이제 다른 세계로 넘어가려 하고 있었다. 나도 할 수만 있다면 들어가고 싶었다. 두 다리에 매달려 있는 무거운 것들을 끊어내고 나도 가볍게 넘어가고 싶었다.
지송이가 활기차게 답했다. "당연하죠. 조심히 들어가세요." 문이 닫히고, 회계팀장의 발소리가 점점 멀어지고, 끝내 들리지 않게 되자 우리는 또다시 몰아뒀던 웃음을 와르르 터뜨렸다. 밭은기침을 하던 지송이가 목이 메었는지 빨대로 사과주스의 색을 닮은 맥주를 급하게 들이켰고 은상 언니는 의자를 45도쯤 뒤로 기울이고 천장을 바라보면서 새끼손가락으로 눈물까지 찍어내고 있었다. 그 모습들이 하찮고 우스워서 나는 내가 보고 있는 이 장면을 사진 찍듯 꼭 붙잡아 어딘가에 담아두고 싶다고 생각했고, 얼마 지나지 않아 이미 그렇게 해두었다는 것을 알아차렸다. 조금 이상했다. 벌써 다 알고 있다는 느낌, 미래에서 나를 과거처럼 내려다보고 있는 것만 같은 기묘한 감각이 일었다. 언제가 될지는 모르겠지만 내가 더는 이 회사에 다니지 않는 때가 온다면, 그리고 그때 이곳을 그리워할 수 있게 된다면, 다른 게 아니라 정확히 바로 지금 이 장면을 그리워하게 될 것이라는 예감. 나는 지금 이 순간의 한복판에 서서 이 순간을 추억하고 있었다.
이게 정말로 내 돈일까? 그런 생각이 잠시 스쳤다가······ 곧바로 내 돈이 맞지 뭘! 이게 그럼 누구 돈이게? 하면서 어쩐지 뻗대고 싶은 기분이 되었다.
이번 제주도행 비행기 티켓을 결제하기 전까지, 나는 가상지갑의 돈을 한번도 현금화해본 적이 없었다. 그 돈에는 손을 대지 않았다. 동시에 매달 내게 입금되는 월급은 그대로였고 그 범위 안에서만 소비를 했다. 사실상 내게 주어진 가용자원은 늘어나지 않은 셈이었다. 그런데도 나는 확실히 삶이 윤택해졌다고 느꼈다. 그것이 거기에 있다는 사실만으로도, 그러니까 몇천만원가량의 숫자가 내 휴대폰에 찍혀 있다는 사실만으로도 정말이지 언니의 표현대로라면 '약간 부자'가 된 것만 같았다. 가상지갑 임에도 불구하고 마치 그게 내 은행 잔고처럼 여겨졌으니까. 유사시에 내가 언제든지 꺼내 쓸 수 있는 돈이 400만원이라고 생각할 때랑 4,000만원이라고 생각할 때랑 기본 적인 마음가짐이 달랐다.
나는 마트의 과일 코너에서 당도가 높은 멜론을 고민 없이 살수 있었고 일반 세제와 프리미엄 세제중에 프리미엄을 고를 수 있었다. 가격표를 볼 때 십의자리 숫자까지 보지 않는 것이 가능해졌다. 유기농 목장의 우유를 사 먹기 시작했다. 예전에는 그때그때 그날 파는 가장 싼 우유를 샀다. 그러다보면 경영방식에 도덕적으로 문제가 많다는 회사의 제품을 살 때도 있었다. 같은 식품 업계이기 때문에 그런 소문이 속속들이 다 사실이라는 걸 누구보다 잘 알면서도 그랬다. 뭐랄까, 그게 내 소비의 기본모드였다. 최저가를 선택해야 한다는 코드가 프로그래밍 되어 있는 것처럼 항상 제일 싼 것만을 골랐다. 이제 더는 아니었다.
처음 먹어본 유기농 목장의 우유는 맛도 물론 좋았지만, 그걸 고르는 나 자신이 비로소 건전한 시민이 되었다는 충만한 기분을 느끼게 해줬다. 화려하지 않으면서도 세련된 로고가 그려진 유기농 우유를 유유히 집어 장바구니에 넣는 동안, 내 머릿속에서 악덕 기업의 사장은 경영악화의 책임을 지고 권좌에서 내려와 어쩐지 수갑을 찬 채 촘촘한 창살 안에 들어가 있었고, 그 위로는 우리에 갇혀 있지 않고 너른 풀밭에서 자유롭게 뛰노는 젖소들과 밀짚모자를 쓴 선한 농부의 땀과 미소가 오버랩되 었다. 그건, 예상했던 것보다 훨씬 더 만족스러운 소비 경험이었다.
"셋이 모처럼 놀러 왔는데 둘이 휴대폰만 보고 있으면, 내 기분이 어떨 것 같아? 심지어 나 앞에 두고 메시지 주고받고. 난 뭐가 돼?" 둘이 몰래 숨을 한번 몰아 쉰 지송이가 계속 쏘아붙였다. "어제부터 계속 그랬지? 내가 모를 줄 알아? 이럴 거면 대체 나랑 여행을 왜 오자고 한 거야?" 아무래도 우리가 너무했다는 생각이 들어서 나는 쥐고 있던 휴대폰을 슬쩍 다시 집어넣었다. 은상 언니도 한발 물러선 듯 누그러진 말투로 다독였다. "그렇게 느꼈다면 미안한데, 우린 여기에 전재산다결 었기 때문에 안 볼 수가 없어. 지금 엄청나게 오르고 있어서 계속 봐야 하거든. 어떻게 설명해야 할지 모르겠는 데····· 너도 이걸 해보면 아마 이해할 거야."
"그만 좀 해!" 지송이가 소리를 빽 질렀다. 주변 테이블에 앉아 있던 사람들이 전부 다 이쪽을 쳐다봤다. "난 안 한다고 했잖아." 새빨개진 얼굴로, 연이어 날을 세웠다. 제발 그만하라고, 언니들은 언니들 모습이 지금 어떤지 모르는 것 같다고, 자기가 봤을 땐 분명 제정신이 아니라고, 코인에 미쳐 돌아버린 것 같다고, 그렇게 돈이 좋으면 열심히 일해서 땀 흘려서 직접 벌 생각을 하라고, 그렇게 돈 놓고 돈 먹기로 버는 돈이 진짜 돈이라고 생각하느냐고, 그건 도박 이나 마찬가지라고······ 그러더니 팔을 길게 뻗어 창밖의 바다를 가리켰다. "너무 돈, 돈, 그러지 좀 마. 있잖아, 언니. 세상엔 돈보 다중요한 게 훨씬 더 많아. 저기 저 아름다운 에메랄드빛 바다한테 미안하지도 않아?"
정확한 명칭은 '오피스 오퍼레이터(Office Operator) 직렬'. 지송이는 고등학교에서 회계를 전공하고 졸업하자마자 작은 규모의 사업장에서 5년 동안 경리로 일하다가 '오오 직렬'로 마론제과에 입사한 거였다. 내가 속한 브랜드실에는 그런 직군이 없어서 전혀 모르고 있었는데, 경영지원실에는 팀마다 한두명씩 있는 모양이었다. 회계팀에서는 지송이가 유일한 '오오'라고 했다.
지송이는 정산 업무만을 위해 '오오'로 고용되었다. 겉으로 보기엔 똑같았다. 사원증의 모양이나 색이 다른 것도 아니었고, 사내 시스템의 조직도에 '오오'라는 표식이 붙은 것도 물론 아니었다. 지송이가 '오오'라는 건 특정 권한이 있는 사람, 이를테면 인사팀 사람들이나 조직장 정도만 알 수 있었다. 똑같은 사무실에서 똑같이 일했고 똑같이 야근도 했고 휴가도 똑같이 받았다. 연말 연초의 업무평가도 다른 직원들과 동일하게 진행했다. 하지만 결정적으로 다른 점이 있었다. 그 평가가 반영되는 '테이블'이었다. 똑같이 '무난', M등급을 받았어도 인상률이 다르게 적용되었다. 입사 당시의 연봉 테이블 또한 따로 책정되어 같은 연차의 다른 직원들보다 급여가 현저히 낮았고, 상여금이나 성과급에서도 제외되었다. 일년에 두 번, 명절마다 나누어주는 제이마트 5만원 상품권도 받아 본 적이 없다고 했다. 그리고 결정적으로, 아무리 오래 일해도 직급이 부여되지 않는다고 했다.
"정말 모르겠어. 내 인생 어디로 가고 있는지. 나 돈 모아야 되는 거 맞아. 이린이랑 사귀는 게 영양가 없는 짓이란 것도 알아. 근데, 지금은 그냥 앞뒤 안 재고 일단 이렇게 살고싶어······ 그런데 동시에 또 너무 불안해······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겠어." "너 하고 싶은 대로 해. 사람이 어떻게 은상 언니처럼 매 순간 각을 재면서 살아? 내가 봤을 땐, 그 언니가 특이 한거야." "그치?" "그럼." 짧고 굵은 두 음절씩의 대화 끝에, 우리는 마침내 발걸 음을 맞추어 걸을 수 있었다.
정말이지 믿고 싶지 않았다. 여기가 끝이라는 사실을. 더 높이 올라갈 줄 알았는데····· 달까지 갈 줄 알았는데······ 아직은, 아직은 빼고 싶지 않았다. 아직 부족해! 그 생각밖에 들지 않았다. 너무너무 부족했다. 지금 가격으로 내 가상화폐 지갑 잔고는 대략 5,000만원이었다. 내가 초반에 넣은 내 전재산과 그후로 퇴직금을 헐어서, 위험한 빚을 내서, 월급을 받는 족족, 야금야금 넣은 금액을 모두 합하면 2,000만원 정도였다. 그러니까 나는 이더리움으로 3,000만원가량을 번 셈이었다. 내 연봉보다 훨씬 큰 돈이었지만, 원금의 거의 1.5배 가까이를 일하지 않고 번 것이었지만, 지난 반년간 꿈꿔온 일확천금의 꿈이 여기서, 고작 여기에서 끝이라는 사실을 도저히 믿고 싶지 않았다.
분했다. 억울했다. 동시에 그런 감정이 드는 나 자신에게 어쩌면 이렇게 뻔뻔할 수 있을까 하는 마음도 들었다. 어쩔 수가 없었다. 사람 욕심이 본디 이렇게 생겨먹은 것 같았다. 염치도 없고 끝도 없었다. 처음 시작할때는 100만원만 벌어도 좋겠다고 생각했는데 아무것도 안 하고 몇백을 벌었더니 천 단위가 벌고 싶었고, 몇천을 벌었더니 몇천 더 벌고 싶어졌고, 나중에는 적어도 억은 있어야 해,라는 욕심이 생겼다. 분명 제주도에서는 가상지갑 잔고가 1억이었다. 1억으로 할 수 있는 것들을 상상하며 지냈더니 3,000만원은 터무니없이 부족하게 느껴졌다.
장군님! 24일 새벽, 밤새 올라가던 그래프가 이번에는 역대 최고가를 찍었다. 드디어 50만원을 돌파한 것이었다. 최고 535,000원까지 기록했고, 내 가상지갑에 다시 억 단위가 찍히기 시작했다. 믿을 수가 없었다. 그 순간부터 인생의 어떤 가능성이 활짝 열리는 것만 같았다. 그러니까. 그 '열린다'는 감각이 머릿속에서 생생한 이미지로 그려질 정도였다. 어느 냉동 창고 같은 데서나 볼 수 있는 거대한 철문 같은게 굳게 닫혀 있다가 시끄러운 쇳소리를 내며 양옆으로 활짝 열리는 감각. 그리고 그 철문의 널 따란 면적만큼이나 커다란 빛이 한번에 쏟아져들어오는, 압도적으로 눈부신 감각.
무엇보다 날 기쁘게 만든 건 밝아진 지송이의 얼굴이었다. 드디어 이익을 보기 시작한 거였다. 그애가 고백했다. 잃기만 할 때는 초조해서 아무 일에도 집중할 수 없었고 온종일 그래프만 들여다보곤 했다고. 그런데 이제는 오르니까 또 오르는 대로 일이 안 되어서 하루 종일 그래프만 보게 되더라는 말이었다. 제주도에서의 우리 마음을 이제야 비로소 알 것 같다고 했다. -나 그때 코인 안 탔으면 정말 어쩔 뻔했어? 너무 아찔해.
가상화폐의 부작용을 걱정하는 기사와 기획물들이 쏟아졌지만 그로 인해 일부 대박 케이스가 알려지자 오히려 너도나도 가상화폐에 뛰어들어 수요 자체가 늘었다는 거였다. 게다가 잘은 모르지만 최근의 부동산과 주식시장이 별볼 일 없으니까 그쪽 돈이 다 코인 판으로 흘러들어온 게 아니겠느냐고 덧붙였다. 이 모든 것들의 타이밍이 다 딱딱 맞아버린 거지. 돈에는 총량이 있어서 결국 한쪽에서 빠지면 그만큼 또다른 쪽으로 몰리게 되어 있다는 거였다. 그러니까 돈 들이 어느 길로 다니는지 잘 눈여겨봐야 한다고 했다. 언니가 결연하게 말했다.
이제부터는 나도 눈을 부릅뜨고 살펴볼 거야. 예전에는 돈이 없어서 그걸 흘려보지도 굴려보지도 못했기 때문에 돈이라는 게 어떤 성질을 지녔는지, 무엇을 타고 어디로 흘러가는지 알 수 없었지만 조만간 가상화폐 전부 매도하고 이 많은 돈을 현금으로 거머쥐게 되면 자기도 그걸 이리 저리 굴려보고 신명나게 갖고 놀아보면서 변하지 않는 돈의 속성을 반드시 찾아낼 거라고 했다. 돈은 대체 어느 쪽으로 흐르는 걸까? 너무 궁금해. 그 원리를 알고 싶어! 은상 언니의 메시지를 본 순간, 머릿속에 하나의 장면이 스쳐지나갔다.
강은상회가 성업 중이던 시절, 불 꺼진 사무실에서 스탠드 조명만 켜두고 어깨를 잔뜩 수그리고 있던 언니의 기이한 뒷모습. 돼지저금통의 배를 가르고 백원짜리와 오백원짜리 동전을 꺼내 열 맞춰 차곡차곡 쌓고 있던 언니의 달뜬 손동작. 나는 돈의 속성을 알아내고 말 거라는 포부를 외치는 은상 언니가 옛날 텔레비전 만화영화에서 보던 음습한 실험실의 미치광이 과학자 같아서 조금 섬뜩해졌다. 하지만 이내 언니와 내가 같은 편이라는 사실을 상기했고, 그 왼쪽 어깨에 두 발을 사뿐히 올리고 앉은 한마리 까마귀가 될수 있어서 얼마나 다행인가, 하며 금세 안도했다.
언니······ 아 심장 떨려······ 나 방금 다털었어. 얼마에? 237만원에. 잘했어. 잘했다. 그 메시지를 끝으로 채팅방이 조용해졌다. 침묵은 한동안 지속되었다. 다음 날, 그다음 날까지도. 새해가 밝은 이래 꼬박 열흘 동안 잠든 시간만 빼고 낮이고 밤이고 종일 울리던 알림 창이 고요해졌다. 쉴 새 없이 들끓고 쏟아지던 선과 숫자, 그리고 주문의 말들이 멈쳤다. 요란하게 퍼붓고 질척이던 욕망의 빗소리가 그쳤다. 높고 험한 바위산의 정상에 올라 거친 숨을 고르는 것 처럼. 사납게 너울지는 파도 위에서 펫목 하나에 의지해 휩쓸리다 가까스로 물에 다다른 것처럼. 우리는 격동하는 그래프 위에서 내려와 평지에 발을 디뎠다. 그제야 비로소 어지럼증이 몰려왔다.
"왜 또 이렇게 쓸데없이 못되게 굴어? 요즘 일 안 하니까 기운이 넘쳐? 여기서 계약 안 할 거면 그냥 나가자." 언니가 투정하듯 말했다. "저 사람이 내가 제일 싫어하는 말 했단 말이야." "무슨 말?" "나한테 그 정도면 충분하다는 말. 너한테 그 정도면 충분하다는 말. 난 그 말이 세상에서 제일 싫어." 역시, 그것 때문이었구나. 은상 언니가 목소리를 낮춘채 이어 말했다. 그 정도면 충분하다는 말을 정말로 싫어 한다고. 그렇게 사람을 아래로 보면서 하는 말이 어디 있느냐고. 그런 말을 들을 때마다 '그 정도'라는 말 앞에 '나 한테는 아니지만'이 생략된 것 같다고 했다. 나한텐 아니지만 너한테는 그 정도면 족하지. 그 정도면 감사해야지, 그런 말들. 기만적이라고 했다. 그런 종류의 말을 하는 사람의 면면을 잘 봐두라고 했다. 그게 정말로 자신을 포함한 누구에게나 모자람 없이 넉넉하다고 생각해서 하는 말 인지를.
그렇게 걱정이야? 너 정도면 엄청 괜찮은 편이야. 어찌 보면 아주 틀린 말은 아니었다. 하지만 그렇게 말하는 사람들은 우거진 솔숲 가까이에, 저기 가장 안쪽에서 나를 향해 그렇게 외치고 있었다. 에이, 너 정도면 안 떨어져, 안 떨어진다니까? 실상은 그렇지 않았다. 결코 그렇지 못했다. 내가 서 있는 곳은 명백한 벼랑의 끄트머리였다. 크고 사나운 물결이 너울질 때마다, 험한 파도가 벼랑을 힘껏 때릴 때마다 그 가장자리가 조금씩 침식되었다. 내가 서 있는 땅의 경계가 자꾸만 깎이고 부서졌다. 돌가루가 되어 아래로 굴러떨어졌다. 그게 내 눈에 고스란히 보였다.
다만 눈에 보이지 않는 것도 있었다. 부서져 추락한 것들이 어디까지 떨어지는지는 볼 수가 없었다. 도대체가 끝도 없이 떨어졌다. 땅에 닿는 소리가 들리지도 않았다. 그게 가장 두려웠다. 두려움 앞에서 할 수 있는 일은 많지 않았다. 깎여나가 떨어진 돌가루만큼, 딱 그만큼만 물러설 뿐이었다. 깎이면 깎이는 대로. 그때그때 조금씩 뒤로 비켜서면서. 추락의 시기를 기약 없이 유예하면서.
한 줄 PICK,
"난 이게 우리 같은 애들한테 아주 잠깐 우연히 열린, 유일한 기회라고 생각해." '우리 같은 애들'이라는 세 어절이 머릿속에 메아리처럼 계속, 또 계속 맴돌았다.
흙수저 여성 청년 3인의 코인열차 탑승기
가진 것 없는 흙수저 3인방, 사회적 약자. 대출로 시작하는 기반 없는 청년들. 그들을 보고 있으면 마음이 짠했고 응원하게 됐다, 곧 불안해졌다. 그들의 끝이 성공일지 실패일지. 가진 것 하나 없는 청년들에게는 그 실패가 다시는 회복할 수 없는 절벽의 끝일 것이란 걱정이 들어서. 응원하는 마음과 불안한 마음으로 어쩔 수 없이 책의 몇 챕터를 조금씩 앞서 확인할 수밖에 없었고, 곧 마지막 장을 먼저 볼 수밖에 없었다. 그들이 실패한다면 마음이 너무 안 좋을 것 같아서. 그들이 성공해서 다행이다. 동시에 나도 그들과 같았으면 하는 상대적 박탈감을 가질 수밖에 없는 속 좁은 모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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