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 한줄

[내돈내산 BOOK리뷰] #008 우리가 빛의 속도로 갈 수 없다면

자본추적자 2021. 6. 3. 23:29

우리가 빛의 속도로 갈 수 없다면 / 김초엽 저



하지만 릴리는 보안을 위해 자신이 고안한 새로운 형태의 알파벳을 사용했고 일부러 데이터 파일 대신 수기를 남긴 것으로 보인다. 그리고 그 문자는 우리가 마을에서 사용했던 문자이기도 했다. 나는 어렵지 않게 릴리의 기록을 해독할 수 있었다. 그것은 릴리가 지구에서 사라지기 전 남겼던 마지막 기록이자, 혼란과 고통에 관한 기록이었다. 릴리는 오랫동안 자신의 삶을 증오한 것으로 보인다. 릴리에게는 나와 같은 질환, 얼굴에 결코 지워지지 않는 흉측한 얼룩을 남기는 유전병이 있었다. 마을에서 자란 사람들에게는 릴리의 얼룩이 특별한 정보 값을 갖지 않는 하나의 특성일 뿐이었지만 지구의 사람들에게는 그것이 릴리를 마음껏 멸시하고 혐오할 수 있는 하나의 낙인이었다. 


나는 말했어. 당신의 마지막 연인을 위해 당신이 할 수 있는 일이 있지 않겠냐고. 나는 그에게 지구로 다시 함께 가겠냐고 물었어. 떠나겠다고 대답할 때 그는 내가 보았던 그의 수많은 불행의 얼굴들 중 가장 나은 미소를 짓고 있었지. 그때 나는 알았어. 우리는 그곳에서 괴로울 거야. 하지만 그보다 많이 행복할 거야. 

 

--- 「순례자들은 왜 돌아오지 않는가」중에서


완벽한 게 아니었어. 나조차도 직접 겪어보기 전에는 몰랐지. 우리는 심지어, 아직 빛의 속도에도 도달하지 못했네. 그런데 지금 사람들은 우리가 마치 이 우주를 정복 하기라도 한 것마냥 군단 말일세. 우주가 우리에게 허락해 준 공간은 고작해야 웜홀 통로로 갈 수 있는 아주 작은 일 부분인데도 말이야. 한순간 웜홀 통로들이 나타나고 워프 항법이 폐기된 것처럼 또다시 웜홀이 사라진다면? 그러면 우리는 더 많은 인류를 우주 저 밖에 남기게 될까?"

"안나 씨."

"예전에는 헤어진다는 것이 이런 의미가 아니었어. 적어도 그때는 같은 하늘 아래 있었지. 같은 행성 위에서, 같은 대기를 공유했단 말일세. 하지만 지금은 심지어 같은 우주 조차 아니야. 내 사연을 아는 사람들은 내게 수십 년 동안 찾아와 위로의 말을 건넸다네. 그래도 당신들은 같은 우주 안에 있는 것이라고. 그 사실을 위안 삼으라고. 하지만 우리가 빛의 속도로 갈 수조차 없다면, 같은 우주라는 개념이 대체 무슨 의미가 있나? 우리가 아무리 우주를 개척하고 인류의 외연을 확장하더라도, 그곳에 매번, 그렇게 남겨지는 사람들이 생겨난다면······."

"이런 식으로, 시간을 끄셔도 소용은,"

"우리는 점점 더 우주에 존재하는 외로움의 총합을 늘려 갈 뿐인 게 아닌가." 남자는 입을 다물었다. 짧은 정적이 흘렀다. 

 

--- 「우리가 빛의 속도로 갈 수 없다면」 중에서


"글쎄, 이해하기 힘든데. 그 돌멩이를 가지고 있다는 게 정말로 그 감정을 소유하는 건 아니잖아?" 유진은 잠시 생각에 잠긴 듯 머리를 긁적였다. 그러더니 휴지통에 버린 제품을 흘끔 보았다. 그녀는 여전히 미간을 찌푸린 내 표정을 살피더니, 진지한 얼굴로 입을 열었다. "선배는 이해할 수 없겠지만 제 생각은 이래요. 물성이라는 건 생각보다 쉽게 사람을 사로잡아요. 왜, 보면 콘서트에 다녀온 티켓을 오랫동안 보관해두는 사람들도 많잖아요. 사진도 굳이 인화해서 직접 걸어두고, 휴대폰 사진이 아무리 잘 나와도 누군가는 아직 폴라로이드를 찾아요. 전자책 시장이 성장한다고 해도 여전히 종이책이 더 많이 팔리고. 음악은 다들 스트리밍으로 듣지만 음반이나 LP도 꾸준히 사는 사람들이 있죠. 좋아하는 연예인들의 이미지를 향수로 만들어서 파는 그런 가게도 있고요. 근데 막상 사면 아까워서 한 번도 안 뿌려보는 사람들도 있다고 하더라고요." 내 얼굴에 떠오른 표정이 바보 같았는지 유진은 씩 웃더니 한마디를 덧붙였다.
"그냥 실재하는 물건 자체가 중요한 거죠. 시선을 돌려도 사라지지 않고 계속 그 자리에 있는 거잖아요. 물성을 감각할 수 있다는 게 의외로 매력적인 셀링 포인트거든요."


"어떤 문제들은 피할 수가 없어. 고체보다는 기체에 가깝지. 무정형의 공기 속에서 숨을 들이쉴 때마다 폐가 짓눌려. 나는 감정에 통제받는 존재일까? 아니면 지배하는 존재일까? 나는 허공중에 존재하는 것 같기도 아닌 것 같기도 해. 그래. 네 말대로 이것들은 그냥 플라시보이거나, 집단 환각일 거야. 나도 알아."

 

보현은 우울체를 손으로 한 번 쥐었다가 탁자에 놓았다. 우울체는 단단하고 푸르며 묘한 향기가 나는, 부드러운 질감을 가진, 동그랗고 작은 물체였다. "하지만 고통의 입자들은 산산이 흩어져 내 폐 속으로 들어오겠지. 이 환각이 끝나면." 우울체 하나가 탁자 위를 굴러 바닥으로 툭 떨어졌다. "그게 더 나은 결론일까." 

 

--- 「감정의 물성」 중에서


스무 살의 엄마, 세계 한가운데에 있었을 엄마, 이야기의 화자이자 주인공이었을 엄마. 인덱스를 가진 엄마. 쏟아지는 조명 속에서 춤을 추고, 선과 선 사이에 존재하는, 이름과 목소리와 형상을 가진 엄마. 지민은 엄마를 생각했다. 엄마는 지민을 닮은 얼굴을 하고 있었을 것이다. 그녀도 아이를 가져서 두려웠을까. 그렇지만 사랑하겠다고 결심했을까. 그렇게 지민 엄마라는 이름을 얻은 엄마. 원래의 이름을 잃어버린 엄마. 세계 속에서 분실된 엄마. 그러나 한때는, 누구보다도 선명하고 고유한 이름을 가지고, 이 세계에 존재했을 김은하 씨. 지민은 본 적 없는 그녀의 과거를 이제야 상상할 수 있었다. 그녀를 용서하거나 그녀에게 용서를 구할 생각은 없다. 그러기에는 너무 늦었다. 한때 그녀가 누구였건, 지민과 관계 맺었던 은하는 지민에게 한 번도 제대로 된 사랑을 준 적 없는 형편없는 엄마였다. 살아 있는 동안 너무 많은 상처를 주고받았다. 하지만 해야 할 말이 있었다

 

--- 「관내 분실」 중에서


한 줄 PICK, 

"우리는 점점 더 우주에 존재하는 외로움의 총합을 늘려 갈 뿐인 게 아닌가."


공학을 전공한 과학도이자 과학적 상상력에 기초한 소재를 사용한 단편 소설집이라는 점에서 테드 창의『당신 인생의 이야기』가 자연스럽게 떠올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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