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디서부터 잘못된 것일까? 성실하게 살아온 마흔넷 인생이었다. 거래처에서 만난 네 살 어린 아내와 결혼하고 쌍둥이를 낳았을 때는 흙수저의 수저질도 아름다울 수 있구나, 생각했다. 금수저를 쥐고 태어난 놈들보다 값진 인생이라 자부하던 시절도 있었다는 말이다.
시간은 그 차이를 알려주었다. 스타트라인부터 앞선 놈들은 해가 거듭할수록 여유가 생겼고 능력과 돈을 축적할 수 있었다. 반면 이제 경만은 탄약이 고갈되어 곧 맨몸으로 돌진해야 하는 참호 속 병사가 된 심정이었다. 아무리 벌어도 써야 할 돈은 늘어만 가는 반면 자신의 체력은 갈수록 깎여나가는 게 느껴졌다. 유일한 장점이던 성실함과 친절함의 바탕은 체력이었고, 나이가 들어가며 딸리는 체력은 성실함과 친절함을 무능력과 비굴함으로 변화시켰다. 체력은 정신력조차 지배하게 되어 멘탈이 털리는 날이 늘어났고, 곧 대표와 동료들의 무시로 돌아왔다.
"코로나가 심해져 어떻게 될지 모르겠어요. 하필이면 필생의 역작을 쓰니까 세상이 뒤집히고 난리지 뭐예요."
정 작가가 마스크 위로 초롱초롱한 눈동자를 빛내며 말했다. 자신의 비극을 웃으며 말하는 그녀의 모습에서 알찬 기운이 느껴졌다. 그건 꿈을 품고 사는 사람이 가진 힘이 아닐까? 새벽의 편의점에서 우리는 이야기했다. 그녀는 내 과거를 캐내기 위해 자신의 과거도 많이 털어놓았다. 나는 자기가 하고자 하는 일에 절대 지치지않는 그녀의 에너지가 부러웠다. 그래서 물었다. 대체 당신을 지탱하는 힘은 무엇이냐고? 그녀가 말했다. 인생은 원래 문제 해결의 연속이니까요. 그리고 어차피 풀어야 할 문제라면, 그나마 괜찮은 문제를 고르려고 노력할 따름이고요..
나는 남은 컵라면을 먹어치우고 자리를 정리했다. 그때 그가 나를 돌아보며 물었다.
“자네는 가족이 있나?"
쓸쓸한 눈빛이었다. 나는 고개만 끄덕였다.
“가족들에게 평생 모질게 굴었네. 너무 후회가 돼. 이제 만나더라도 어떻게 대해야 할지 모르겠어."
나는 질문에 대답하려 애썼다. 나 자신에 대한 질문이기도 했기 때문이었는데, 그래서일까 무어라 말이 터지질 않았다. 내가 씁쓸한 표정으로 아무 말도 못 하자 그는 괜한 말을 했다는 듯 손사래를 치고 컵라면 그릇과 함께 몸을 돌렸다.
“손님한테 하듯...... 하세요."
불쑥 튀어나온 말에 그가 나를 돌아보았다.
“손님한테…… 친절하게 하시던데…… 가족한테도…… 손님한테 하듯 하세요. 그럼…… 될 겁니다."
"손님에게라……. 그렇군. 여기서 접객을 더 배워야겠네."
곽 씨가 고맙다는 말을 덧붙이고는 뒷모습을 보였다. 따지고 보면 가족도 인생이란 여정에서 만난 서로의 손님 아닌가? 귀빈이건 불청객이건 손님으로만 대해도 서로 상처 주는 일은 없을 터였다. 불쑥 내뱉은 말이지만 그에게 답이 되었다니 마음이 놓였다. 그런데 내게도 답이 될 수 있을까? 아니 나는 감히 손님이라도 될 수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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