히노에게 보이지 않는 곳, 히노가 눈치채지 못하는 곳에서 뭔가가 떨렸다.
그 순간 나는 행복했다.
쌓아 올려온 것이 조금이라도 우리 둘 사이에 있다면 기쁠 것 같았다.
눈을 감았다. 그러면 감각의 범위가 조금 넓어진다. 그 느낌을 즐겼다.
태양의 온기, 잔디 냄새. 옆 사람의 호흡까지 느껴질 듯했다
강한 바람이 불어와 눈을 떴다. 옆에서 그 애가 긴 머리를 붙들고 있었다.
그 짧은 시간 속에 뭔가 말하려 했다.
연애를 거짓으로 할 수 없게 된 나 자신을 깨달았다. "널 좋아해도 될까.”
그렇게 물었을 때는 이미 바람이 그쳐 있었다.
지금을 다 말하기도 전에 끝나버리는 지금 이 순간을 생각했다.
그래. 좋아하는구나. 말로 하고는 실감했다. 나는 너를...
히노가 천천히 시간을 들여 나를 돌아봤다.
"안돼.” 그 애가 말했다. “왜?”
나는 물었다. "나 말이지….”
망설임을 떨쳐내지 못하는 것처럼 히노가 고개를 수그렸다.
또 바람이 불었다. 히노의 긴 머리를 바람이 채가려 했다.
“병이 있어. 선행성 기억상실증이란 건데.
밤에 자고 나면 잊어버리거든. 그날 있었던 일을 전부."
바람에 뒤섞여서 그런지 그 애의 목소리가 내게 도달하기까지 시간이 걸렸다.
히노는 밤에 잠이 들면 그날 있었던 일을 모두 잊어버린다. 하루하루를 쌓아 올릴 수 없다. 대체 얼마나 절망스러울까. 얼마나 괴로울까.
자기만 시간의 흐름에 따라가지 못하는 데다 미래까지 빼앗겼다.
그렇다면 내일의 히노가 조금이라도 일상을 즐겁게 느낄 수 있도록, 히노가 쓰는 일기를 즐거운 추억으로 가득 채워주자.
그것을 읽고 내일의 히노들이 조금이라도 용기를 얻을 수 있도록,
조금이라도 미래에 대한 공포를 덜어줄 수 있도록.
“꽤 많이 나왔네. 그럼 하나씩 해보자. 먼저 뭐부터 할 까..… 그래, 기왕 하는 거, 오늘은 자전거 뒤에 타볼래?"
내가 적극적인 어조로 말하자 히노는 놀란 듯했다.
"어, 괜찮아? 그보다 너도 전철 타고 다니잖아. 자전거는 어디서 나?"
새롭고 즐거운 일상을 시작하자. 그게 바로 희망일 것이다.
안 그래, 히노?
계획이 있던 나는 평소라면 짓지 않을 표정으로 씩 웃었다.
누군가를 좋아한다는 것은 마음이 풍족해지는 일이라고 말하듯이.
언젠가는 과거의 일부가 될거야.
어떤 상처든 한번 입고 나면 완전히 사라지진 않아. 상처는 기억이기도 하니까.
하지만 아픔이 계속되진 않거든. 그렇게 해서 살아가는 거라고 생각해.
상처는….… 사라지지 않지만 아픔이 계속되는 것은 아니다.
사람은 그렇게 해서 슬픔을 소화해가는 걸까. 슬픔을 잊게 되는 걸까.
'책 한줄' 카테고리의 다른 글
[내돈내산 BOOK리뷰] #020 명상 살인 (0) | 2021.09.07 |
---|---|
[내돈내산 BOOK리뷰] #019 51% 게임 손자병법 (0) | 2021.08.30 |
[내돈내산 BOOK리뷰] #017 불안한 사람들 (0) | 2021.08.16 |
[내돈내산 BOOK리뷰] #016 현명한 자산배분 투자자 (0) | 2021.08.08 |
[내돈내산 BOOK리뷰] #015 주식시장을 이기는 큰 비밀 (0) | 2021.07.21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