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위를 둘러보았다. 카페 안에는 커피를 마시는 사람들과 종업원들과 지점장 정도 되어 보이는 말쑥한 남자가 있었다. "집에 있지 않을까요?"
"그게 핵심입니다. 생산수단에 고용된 노동자는 자신의 삶을 노동하는 데 사용하지만, 생산수단을 소유한 자본가는 노동에서 자유로워집니다. 자신의 삶을 찾게 되는 거죠."
비서실장이 반문했다. "노동에서도 삶의 가치를 찾을 수 있는 거 아닙니까?"
"그럼 평생 노동만 하다 죽든가."
"초면에 무슨 말을 그렇게···."
"노동의 신성함에 대한 강조는 사회 구성원들이 평등한 관계를 유지할 때만 의미가 있습니다. 생산수단을 소유한 자본가와 그렇지 못한 노동자가 있고, 이로 인해 불평등한 사회적 관계가 형성되어 있으며, 그래서 노동의 대가로 최소한의 삶만을 겨우 유지하는 사람들이 존재하고 있다면, 그 사회에서 노동의 신성함을 이야기하는 것만큼 비열한 행위는 없습니다."
한국의 베이비붐 세대에 해당하는 B집단은 생산과 소비를 통해 한국사회를 성장시켰다. 그리고 이제 차츰 은퇴를 앞두고 있다. 이제 C집단이 그 뒤를 잇는다. C집단은 성장 과정 내내 이미 양적으로 팽창되어 있는 산업구조들과 대면해야 한다. 그리고 자기 집단의 생산과 소비 능력에 부합할 만큼 산업의 파괴와 조정을 감당해야 한다.
부모 세대인 B와 자녀 세대인 C는 경제, 사회적으로 다른 환경에 처해 있다. 살아가면서 B는 지속적인 팽창을, C는 지속적인 수축을 경험한다. 이러한 경험은 개인의 사고관을 규정한다. 지속적인 성장만을 경험했던 B는 이러한 사고관을 갖는다. '열심히 노력하고 최선을 다해 경쟁하면 부를 획득할 수 있다.' 이것은 그들이 삶 속에서 직접 목격한 사실이다. 반면 지속적인 수축만을 경험했던 C는 다음과 같은 사고관을 갖는다. '부모 세대는 시대적인 혜택을 통해 사회의 기득권과 부를 독점했고 지금의 청년들에게는 기회가 주어지지 않는다.' 이것은 그들이 삶 속에서 직접 목격한 사실이다.
B에게 C는 자기변명이나 하는 나약한 세대로 보인다. 그리고 C에게 B는 자기 성공의 신화를 맹신하는 이기적인 세대로 보인다. 이것은 충분한 평가가 아니다. 자신의 세대가 속했던 경제적 환경을 고려하지 않고 다른 세계를 평가한다는 것은 공정하지 못하다.
부모 세대인 집단 B는 성장하는 사회를 경험하면서 그 속에서 성장하는 사회의 아비투스를 내재화한다. 타인보다 노력함으로써 성공하는 삶을 살아야 하고, 이를 위해 안정적인 직장을 가져야 하고, 저축과 투자를 함으로써 부를 쌓아야 한다는 사고방식이 내재화된다. 반면 자녀 세대인 집단 C는 앞으로 정체된 사회를 경험하게 될 것이다. 그리고 그 속에서 성장하지 않는 사회의 아비투스를 내재화할 것이다. 노력이 성공을 보장하지 않으며, 최소한의 권리도 치열한 경쟁을 통해서만 얻을 수 있음에 만성적인 피로를 느낄 것이다. 이로 인해서 경쟁과 성공을 멀리하는 사람들이 늘어날 것이다. 안정적인 직장도 없고 저축과 투자도 의미 없다.
B집단과 C집단의 아비투스는 그 자체로는 좋거나 나쁜 것이 아니다. 구조적인 경제적 환경에 따라서 부모 세대는 성장에 대한 가치관을 갖고, 자녀 세대는 정체에 대한 가치관을 갖는 것이 반드시 잘못된 것은 아니다. 사람은 각자가 취한 환경에 만족하며 살아간다. 문제는 사회의 중심을 차지한 부모 세대의 가치관이 주변부를 맴도는 자녀 세대에게 상징적 폭력으로 주입된다는 점에 있다. 대학 입시에서 떨어진 학생은 부모에게 죄송함을 느낀다. 취업을 하지 못하고 학교에 남겨진 학생들은 선생님에게 죄송하다고 말한다. 경쟁을 포기한 청년들은 목소리를 높여 권리를 주장하는 대신 주어진 환경을 인내한다. 부모 세대의 개인적 성공에 대한 아비투스는 자녀 세대에 주입되어 사회적 문제를 개인적 실패의 문제로 해석하게 만든다. 사회적 성공과 경쟁적 삶의 추구를 정상적인 가치로 상정하는 학교, 미디어, 부모 사회의 상징적 폭력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한국은 생산가능 인구의 감소와 베이비붐 세대의 은퇴를 앞두고 있는 까닭에 공급 과잉과 수요 부족의 상황에 직면할 것으로 예상된다. 이것은 자산 가치의 하락과 소비심리의 위축을 일으켜 지속적인 디플레이션 압력으로 작용할 것이다. 디플레이션으로 인한 경기침체를 피하기 위해 정부는 인플레이션 정책을 취할 가능성이 높다. 통화량 팽창을 통해 소비와 투자를 촉진하고 환율을 상승시켜 수출이 유리한 상황을 만들 것이다. 이로 인해서 수출 중심의 대기업이 이익을 얻고, 소비자와 노동자로서의 개인의 희생이 커질 수 있다. 빈부격차가 심화될 가능성이 높은 것이다.
저성장을 반드시 비관적으로 받아들여야만 하는 건 아니다. 앞서 우리는 큰 틀에서 경기를 순환의 관점에서 파악할 수 있음을 보았다. 인구로 인한 혜택과 빠른 성장의 시간이 있었으니, 이제는 조정과 내실의 시간을 보낼 차례인지 모른다. 우리의 젊은 세대는 부모 세대가 생각하지 못하는 자신들만의 방식으로 이 시간을 의미 있게 견뎌낼 것이다. 문제는 저성장과 경기침체에 있는 것이 아니다. 진짜 문제는 상징적 폭력에 있다. 성장만이 정상이고 경제적 성공만이 유일한 목표라는 지난 시대의 가치관을 부여잡은 채, 앞으로의 시간을 비정상으로 규정할 사고방식이 문제다. 새로운 환경에서 새롭게 등장할 가치관이 건강하게 자랄 수 있도록 성장의 담론을 내려놓을 차례다.
미래의 한국사회는 어떠한 방향으로 나아가야 할 것인가? 물론 이 것은 하나로 고정된 방향은 아닐 것이다. 직면한 현실을 고려하고, 개인과 사회의 이익을 고려해서 시민이 그때마다 선택해야 할 문제다. 당장 눈앞에 놓인 미래는 세계적인 저성장과 통화량 팽창 경쟁, 그리고 한국에서의 생산가능 인구 감소와 베이비붐 세대의 은퇴다. 앞으로의 세계는 디플레이션 압력에 따른 개별 국가의 인플레이션 정책이 주가 될 것이고, 한국도 크게 다르지 않을 것이다. 이 과정에서 수출 중심의 대기업은 어려운 시기를 빠듯하게 견뎌낼 수 있을 것이고, 노동자는 물가 상승과 실질임금 감소에 따른 내수 부진과 빈부격차의 심화를 겪게 될 것이다.
우리는 선택해야 한다. 한국의 경제를 책임지고 있는 대기업의 성장을 위해 우선은 시장의 자유를 추구할 것인가? 아니면 지속적으로 심화될 내수 부진과 빈부격차 완화를 위해 우선적으로 정부의 개입을 추구할 것인가?
그리고 이러한 선택은 시민의 정치적 행동으로 결정된다. 우리가 보수 정당에 혹은 진보 정당에 투표한다는 것은 특정 정치인을 지지하는 것이 아니다. 또한 우리를 대표하는 누군가를 선발하는 것도 아니다. 시민의 정치적 행위로서의 투표는 시장의 자유와 정부의 개입이라는 사회 방향성의 선택이며, 궁극적으로 세계의 선택이다.
"당신을 기다려온 우리들에게 한마디 해주세요." 사람들의 얼굴을 다시 한 번 둘러봤다. 마음이 확고해졌다. 너무도 먼 길을 돌아서 이 앞에 섰다. 비서실장은 눈을 감았다. 잠깐의 침묵이 흘렀다. 시민은 눈을 뜨고 이렇게 말했다.
"지금처럼 계속 걸어가야 합니다. 우리가 해야 하는 건 두 가지입니다. 나를 바꾸는 것과. 세상을 바꾸는 것. 우선 나를 바꿔야 합니다. 나의 일에 열정을 쏟아붓고, 사람들과 경쟁하고, 사랑하는 사람들을 돌보면서 그렇게 건강하게 나아가야 합니다. 다음으로 세상을 바꿔야 합니다. 하나의 경제체제를 선택하고, 이를 반영하는 하나의 정당을 지지해야 합니다. 나의 이익을 대변해주는 정당을. 신문을 접고, 티브이를 끄고, 타인의 말에 휩쓸리지 말고, 나의 현실을 직시한 후에 정말 나에게 이익이 되는 세계가 무엇인지 현명하게 판단해야 합니다.
한줄 PICK,
노동의 대가로 최소한의 삶만을 겨우 유지하는 사람들이 존재하고 있다면, 그 사회에서 노동의 신성함을 이야기하는 것만큼 비열한 행위는 없습니다
복잡한 세상을 이해하기 위한 쉽고 단순하고 명쾌한 정리. 지대넓얕부터 유튜브 채사장 유니버스까지,
채사장님이 있어 감사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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